
데인 드한 주연의 2012년 영화 크로니클(Chronicle)은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1,200만 달러 대비 1억 2,6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데인 드한 때문에 별 기대 없이 켰는데,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초능력 영화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학교폭력 피해 아이의 붕괴를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파운드푸티지 형식이 만들어낸 불편한 현실감
크로니클은 파운드푸티지(Found Footage) 기법으로 촬영된 영화입니다. 여기서 파운드푸티지란 등장인물이 직접 촬영한 것처럼 보이도록 핸드헬드 카메라나 캠코더 영상을 편집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촬영 방식입니다. 주인공 앤드류가 캠코더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설정 자체가 이 기법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방식이 특히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앤드류의 폭력적인 가정환경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무런 편집 없이 날것으로 전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지병이라는 설정이 텍스트로 설명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화면과 끊기는 앵글로 보이니 불편함이 배가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파운드푸티지 영화는 공포물에 주로 쓰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만큼 청소년의 심리 붕괴를 리얼하게 담아낸 사례는 드물었습니다.
앤드류의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 흐름 속에서 심리적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합니다. 처음에는 소심하고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던 앤드류가 싱크홀에서 정체불명의 물체를 접촉한 뒤 염력(Telekinesis)을 얻게 됩니다. 염력이란 물리적 접촉 없이 정신력만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능력을 의미하며, 영화에서 앤드류와 친구들이 주변 사물을 하나씩 제어해 가는 장면이 이에 해당합니다.
초능력보다 먼저 곪아 있던 것들
영화의 핵심은 초능력이 아닙니다. 저는 이 점을 두 번째 감상에서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앤드류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초능력을 남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망가져 있던 내면이 능력을 매개로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학교폭력 피해가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교육부의 2023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경험 학생의 절반 이상이 불안감, 자존감 저하, 대인기피 증상을 복합적으로 보고하였습니다(출처: 교육부). 앤드류가 보여주는 증상들, 즉 사회적 고립, 분노 조절 실패, 자기파괴적 행동은 실제 학교폭력 피해 청소년에게서 나타나는 트라우마(Trauma) 반응과 거의 일치합니다. 여기서 트라우마란 극심한 심리적 충격이 장기적으로 남아 일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영화에서 앤드류가 점차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들을 보면서, 저는 단순히 빌런의 탄생을 보는 게 아니라 붕괴 직전의 아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스티브가 사라지는 장면 이후 앤드류의 행동 변화는 특히 그랬습니다. 미국에서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총기를 들고 학교를 찾아가는 사건이 반복되는 것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의 흐름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쌓이고 쌓인 분노가 임계점을 넘을 때 어떤 형태로 터져 나오는지를 이 영화는 꽤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앤드류가 엄마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는 전개는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사실 그 동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기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가정도, 학교도, 친구관계도 모두 무너진 상태에서 남은 건 능력뿐이었고, 앤드류는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앤드류의 타락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정폭력과 모친의 지병으로 인한 만성적 스트레스 누적
- 학교 내 아웃사이더 생활로 인한 사회적 고립
- 초능력 획득 이후 일시적 소속감과 인기를 경험하나 기반이 취약함
- 스티브의 죽음으로 유일한 정서적 연결고리가 끊어짐
- 분노 조절 실패와 충동적 범죄 행동으로 이어짐
만약 제가 초능력을 얻는다면, 그리고 이 영화가 남긴 것
조금 가볍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앤드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염력이 생긴다면 저는 어떻게 할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 결론은 마술사나 서커스 퍼포머로 진로를 잡겠다는 것입니다. 초능력도 결국 제 능력이니,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연습을 하면서 동시에 수입도 올릴 수 있다면 이상적입니다. 그다음으로는 방송 출연을 고려해 볼 것입니다. 시청률 면에서는 보장이 된다고 보거든요.
일반적으로 초능력물은 히어로가 되거나 악당이 되는 이분법적 서사로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크로니클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앤드류는 히어로도 빌런도 아닌, 그냥 망가진 아이였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극을 통해 감정이 정화되고 해소되는 경험을 뜻합니다. 영화는 앤드류의 파국 이후 맷이 티베트 고원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이 마지막 장면이 묘하게 그 카타르시스 역할을 합니다.
국내 청소년 정신건강 관련 지표를 보면, 청소년의 정서적 지지 자원 부재가 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증폭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앤드류의 이야기는 그래서 단순한 픽션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크로니클은 초능력 영화의 탈을 쓴 학교폭력·가정폭력 피해자의 내면 붕괴기입니다. 데인 드한의 연기가 이 모든 것을 설득력 있게 받쳐줍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오락 영화를 기대하기보다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앤드류가 제대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