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다닐 때를 떠올리면 유독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얼마나 좁은 세계였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죠. 영화 바람은 그 좁은 세계를 살아낸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7년 만에 바람의 후속작 짱구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복습 겸 다시 꺼내 봤는데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밀려왔습니다.
부산 사투리, 진짜와 미디어 사이
혹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사투리를 들으면서 "저게 맞나?" 싶었던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확히 그 반대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접하던 미디어 사투리와는 결이 달랐거든요.
주변에 부산 출신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함께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게 진짜 부산말이다, 삼촌이 하는 말이랑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쓰는 건 억양만 남아있지 사투리가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도 사투리가 심하다고 느꼈는데, 세대 차이라는 게 이런 데서도 드러나더군요.
이 지점에서 언어학적으로 흥미로운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방언 평준화(dialect leveling)입니다. 방언 평준화란 특정 지역 방언이 표준어나 다른 방언의 영향을 받아 고유한 어휘와 음운이 점점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지역 고유의 말이 세대를 거치며 희석되는 과정입니다. 부산 출신 친구들이 스스로 "사투리가 별로 없다"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 현상의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의 언어 재현 방식도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이른바 강호동 톤의 과장된 경상도 사투리가 공식처럼 통했는데, 요즘은 그런 미디어 사투리를 사용하는 콘텐츠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대신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가 등장하면 되도록 해당 지역 출신 배우를 캐스팅해서 언어적 위화감을 줄이려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빈자리, 간경화가 남긴 것
이 영화가 단순한 학원물이 아닌 이유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간경화(liver cirrhosis)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인데, 간경화란 장기간의 간 손상으로 인해 간 조직이 섬유화되고 기능을 상실해 가는 만성 질환입니다. 흔히 음주와 연관 짓지만, 간염이나 대사 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그 장면에서 울었는데, 나중에 이 영화가 배우 정우의 실제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니 감정이 달라졌습니다. 배우가 오열하는 그 장면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울컥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데, 그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괜찮은 어른이 될게요, 걱정 마세요" 그 한 마디를 끝내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많은 분들이 부모님에게 비슷한 말을 미루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부분이 가장 찔렸습니다.
가족 관계에서의 정서적 단절은 청소년기에 특히 자주 발생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국내 청소년 정신건강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의 상당수가 또래 관계를 가족 관계보다 우선시하며 가족과의 대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단지 픽션이 아닌 이유입니다.
학교라는 세계, 그리고 성장의 의미
혹시 학창 시절에 별것도 아닌 일로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그때는 진짜 세상이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거든요. 영화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복학생과의 대립,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싸움, 여자친구 전 남자친구와의 갈등까지, 그 좁은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이 거대하게 느껴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개인의 미성숙함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학생 때 접하는 사회는 학교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 안에서 또래 집단 내 사회적 위계가 형성되고, 여기서 뒤처지거나 소외되면 실제로 심각한 정서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를 또래 사회화(peer socialization)라고 부르는데, 또래 사회화란 청소년이 또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 규범, 가치관, 행동 방식을 학습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때로는 폭력이나 서열 문화와 뒤섞인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불법 서클에 합류하고, 후배를 스카우트하며 카리스마를 키워가는 과정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방식이었던 거죠. 졸업 후 회상하며 1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주인공의 심리도, 그때의 결정들을 다시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 순수한 혼란의 시절 자체가 그리웠던 것으로 읽힙니다.
이런 청소년기 집단 경험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의 학교 내 관계 경험은 성인기 사회적 적응력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영화 바람이 그저 '주먹 좀 썼던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겪는 갈등이 때로는 가장 소중한 우정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를 멀어지게도 만듭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 저는 그게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짱구 개봉을 앞두고 바람을 다시 본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건드렸습니다. 사투리 하나에서 시작해 아버지, 학창 시절, 후회까지 이어지는 영화입니다. 후속작을 보러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실 분들께는 꼭 아버지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눈여겨보시길 권합니다.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