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로맨스 영화 하면 으레 두 사람이 만나고, 갈등이 생기고, 결국 사랑으로 끝나는 공식을 기대하는데, 영화 더 초이스를 다 보고 나서 제가 든 첫 생각은 "이거 사실 바람 이야기 아닌가?"였습니다. 아름다운 포장지 안에 뭔가 불편한 게 들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감정이입이 흔들린 이유, 개비의 선택
영화에서 여주인공 개비는 의대생으로, 의사 남자친구 라이언 매카시와 사귀는 상태에서 옆집으로 이사 온 수의사 트래비스와 가까워집니다. 처음에는 짜증스러운 이웃 정도였는데, 라이언이 병원 개원 문제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집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자꾸 흔들렸던 건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개비가 트래비스에게 끌리는 감정은 이해합니다. 감정이란 게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감정이 생겼다면, 라이언과 관계 정리를 먼저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요. 라이언이 없는 틈을 타 트래비스와 가까워지면서도 여전히 라이언의 연인으로 남아 있다는 게 저는 어떻게 봐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로맨스 서사에서 흔히 쓰이는 기법 중 하나가 "정서적 외도(emotional affair)"입니다. 여기서 정서적 외도란 신체적 관계없이도 정서적 친밀감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관계 충성도(relationship fidelity)를 해치는 행동으로 분류합니다. 관계 충성도란 연인 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헌신을 유지하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개비가 트래비스의 저녁 초대에 응하고, 그의 비밀 장소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은 이 정서적 외도의 전형적인 패턴과 꽤 유사하게 보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라이언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그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개비를 완벽하게 사랑했고, 무엇 하나 잘못한 게 없었습니다. 개비가 라이언의 사랑을 "숨 막힌다"라고 느꼈다면, 그건 관계의 문제이지 라이언 개인의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결국 라이언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상황에 휘말린 피해자처럼 보였습니다.
다음은 제가 개비의 행동에서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본 지점들입니다.
- 연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이성과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한 것
- 감정이 생긴 시점에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두 관계를 동시에 유지한 것
- 라이언에게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 결국 개비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
불륜논란과 영화가 말하는 선택의 의미
영화 속에는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삶은 매순간 선택의 연속이죠.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사소한 결정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이 문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문장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제가 가볍게 내린 선택이 미래의 저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 말은 분명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독백이 개비와 트래비스의 관계를 합리화하는 장치로 쓰이는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둘러싼 온라인 반응을 보면 의견이 갈립니다. 트래비스의 성장 서사와 개비를 향한 헌신에 감동받았다는 쪽과, 개비의 행동이 현실에서는 용납되기 어렵다는 쪽이 공존합니다. 저는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트래비스 캐릭터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가 연인이 있는 개비에게 인간적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갖고 관계를 발전시킨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연인이 있는 상대에게 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경계 설정(boundary setting) 실패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경계 설정이란 관계에서 자신과 타인의 감정적·행동적 한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능력을 말하며, 건강한 관계를 위한 기본 조건으로 꼽힙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서도 관계 내 정서적 친밀감의 경계가 불분명해질 때 관계 만족도와 신뢰 손상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다수 보고하고 있습니다(출처: APA). 또한 영화 속 트래비스가 어머니를 14살에 잃은 뒤 신을 멀리하며 혼자이기를 선택한 심리적 메커니즘은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과도 연결됩니다. 애착 이론이란 존 볼비(John Bowlby)가 제시한 개념으로, 유년기의 상실 경험이 성인이 된 후의 친밀감 형성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사전). 트래비스가 벽을 쌓고 살아온 이유가 단순한 바람기가 아니라 이 맥락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고 나면, 그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시선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서 개비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트래비스가 매일 병원을 찾아가 기도하는 장면은 분명 감정적으로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신을 믿지 않던 사람이 기도를 선택하는 순간이라는 서사적 반전은 잘 짜인 장치였습니다. 영화적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감동이 앞선 관계의 복잡함을 덮어버려야 하는가, 그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면 그 감정은 충분히 유효합니다. 동시에 트래비스의 성장 서사에 감동받았다면 그 역시 타당한 반응입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도덕적 판단과 감정적 공감이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그게 이 영화가 남긴 가장 현실적인 질문 같습니다. 개비와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적어도 "나는 연인이 있는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제 기준으로 꽤 불편하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