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어린이날이 다가오니 어린이날 특집으로 애니메이션을 두 편이나 고른 건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슈퍼배드 2를 다시 보고 나서 그루라는 캐릭터를 예전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악당 출신이 잼과 젤리 사업가가 되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는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오늘은 그 이유를 풀어볼까 합니다.
악당도 가족 앞에선 달라진다 — 그루의 캐릭터 배경
1편에서 슈퍼빌런(supervillain)으로 등장했던 그루가 2편에서는 잼과 젤리를 만드는 평범한 사업가로 나옵니다. 슈퍼빌런이란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만화적 악당 캐릭터를 가리키는 용어로, 슈퍼배드 시리즈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루는 악당 퇴치 연맹(AVL)의 요청도 처음엔 단칼에 거절할 만큼 이미 그 세계와 선을 그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집착하던 악당 생활을 이렇게 쉽게 접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미니언들에게 잼을 권하고, 아그네스 생일 파티에서 직접 요정 분장을 하는 그루를 보다 보면 그게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미니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다는 설정도 그렇고, 마고·에디스·아그네스와 함께하는 장면마다 그루는 진짜 보호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주인공이 이야기를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곡선을 뜻하는 서사 기법 용어입니다. 그루의 캐릭터 아크는 1편에서 2편으로 넘어오면서 완성되는데, 단순히 악에서 선으로 바뀌었다기보다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을 찾은 사람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런 서사 구조가 어른에게도 슈퍼배드가 단순한 어린이 애니메이션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엘 마초라는 거울 — 악당을 보는 두 가지 시각
2편의 메인 빌런인 에두아르도 페레즈, 즉 엘 마초는 흥미로운 포지션을 차지합니다. 거대한 상어를 타고 화산 속으로 사라진 전설적인 악당이었던 그가 지금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동네 아저씨로 살고 있습니다. 그루와 묘하게 평행선을 이루는 설정이죠.
그루가 AVL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파라다이스 몰에 잠입하면서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과정을 보면, 저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의 일면만 보고 판단 내리는 게 맞는 건가?' 그루도 처음엔 멕시코 국기 장식이 달린 컵케이크 주문 하나로 에두아르도를 확신했고, 그 확신은 실제로 맞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빗나갈 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그 사람의 모습이 명백히 나쁘게 다가왔다면,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는 이유로 판단을 무한정 유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짧은 인상으로 함부로 결론 내리는 것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슈퍼배드 2에서 엘 마초가 아들 안토니오를 대하는 모습이 잠깐 등장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꾸미면서도 아들을 자기 파티에 부르고 소개하는 장면인데, 그걸 보면서 '나쁜 사람도 자기 가족에게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게 그 사람의 나쁜 행동을 상쇄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엘 마초가 PX-41 세럼을 이용해 미니언들을 살인 병기로 개조하는 장면은, 그루의 과거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PX-41 세럼이란 극 중에서 생물체를 파괴 불가능한 살인 기계로 변이 시키는 물질로, 이 세럼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 2편의 핵심 플롯입니다. 이 세럼을 악용하는 엘 마초와, 그것을 막으러 나서는 그루의 대비가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를 드러냅니다.
슈퍼배드 2에서 주목할 만한 서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루: 악당 출신이지만 가족을 위해 스스로 변화를 선택한 인물
- 엘 마초: 가족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세계 지배의 야망을 포기하지 못한 인물
- 루시: 임무와 감정 사이에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는 캐릭터
인간관계가 남기는 질문 — 그루와 루시, 그리고 나
제가 슈퍼배드 2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건 사실 그루와 루시의 관계였습니다. 루시는 AVL 요원으로 처음엔 그루를 납치하다시피 데려오지만, 파트너로 함께 일하면서 감정이 쌓입니다. 호주로 발령이 나면서 떠났다가 결국 스스로 돌아오는 장면이 저는 꽤 좋았습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선택하는 장면이거든요.
루시가 그루에게 립스틱 전기총을 선물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립스틱 전기총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신뢰를 상징하는 오브제(objet)로 기능합니다. 오브제란 특정 감정이나 관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서사적 소품을 의미하며, 영화에서는 인물 간의 감정선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데 자주 쓰입니다. 실제로 루시가 선물한 그 전기총으로 그루가 엘 마초에게 맞서 싸우는 장면은, 루시의 신뢰가 그루에게 힘이 됐다는 걸 말없이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인간관계에서 가장 고민이 길어지는 순간은 '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겪은 이 감정이 맞는 건가'를 의심하게 될 때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이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 걸 보면, 사람에게 가장 에너지를 쓰게 만드는 건 역시 인간관계인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캐릭터 감정 서사가 관객의 공감 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미국 심리학회(APA)에 따르면, 허구의 캐릭터에 감정 이입하는 경험이 실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심리학회).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슈퍼배드 같은 애니메이션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또한 서사 구조와 캐릭터 설계의 측면에서 봐도, 슈퍼배드 시리즈는 시각적 유머와 감정 서사를 함께 설계하는 데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픽사(Pixar)나 드림웍스(DreamWorks) 계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설계 원칙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가장 오래 기억되는 캐릭터는 결함이 있되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출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영화예술학교).
어린이날이 다가올수록 '이 애니메이션 좀 어른스럽게 보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그게 오히려 이 시리즈를 두 번 세 번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인 것 같습니다. 그루가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사람에서 아이들의 아빠가 된 것처럼, 사람은 어느 시점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로 달라진다는 걸 슈퍼배드 2는 꽤 담백하게 보여줍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그냥 한 번 더 봐도 나쁘지 않을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