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미디 영화를 봐도 배꼽을 쥐고 웃었던 적이 없다고 느끼시는 분, 혹시 계신가요? 저는 꽤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편으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화이트 칙스, 저에게는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 웃음의 기준점이 된 작품입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던 임무, 두 요원이 나선 이유
FBI 요원 케빈과 마커스는 솔직히 말해서 조직 내 문제아 콤비에 가깝습니다. FBI 반장이 연쇄 납치 사건 브리핑에서 재벌가 윌슨 자매를 보호하기 위한 현장 급습 임무를 제안했을 때, 베테랑 요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위험하고 까다로운 임무인 데다 타깃인 윌슨 자매가 이미 악명 높기로 유명했으니까요.
결국 최근 사고를 연달아 치며 반장 눈 밖에 났던 이 두 요원만이 손을 들었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강제였던 셈이지요. 직접 겪어보니, 어떤 이야기든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뛰어드는 구조가 훨씬 더 웃기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처음 느꼈습니다.
막상 윌슨 자매를 만난 두 요원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한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싸가지 없는 태도와 제멋대로인 성격은 둘째 치고, 방심한 사이에 애완견이 차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차량까지 고장 납니다. 윌슨 자매가 파티 참석을 거부하면서 케빈과 마커스는 해고 위기에까지 몰리고, 이 절박한 상황에서 케빈이 꺼낸 아이디어가 영화의 핵심이자 가장 황당한 발상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직접 윌슨 자매로 변장해서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수분장 기술이 만들어낸 황당한 변신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케빈과 마커스가 백인 여성으로 탈바꿈하는 특수분장(Special Effects Makeup) 시퀀스입니다. 여기서 특수분장이란 실리콘 프로스테틱(Prosthetic)이라 불리는 인공 피부 조각을 얼굴에 붙이고, 색소 조정과 위그(Wig) 착용 등을 통해 외모를 전혀 다른 인물로 바꾸는 기술을 말합니다.
흑인 남성을 백인 여성으로 변장시킨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말이 안 되는 조합인데, 그걸 실제로 구현해냈다는 점이 2004년 기준으로는 꽤 대단한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골격 자체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 처음 화면에 등장했을 때 '저게 진짜 여자처럼 보이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눈을 깜빡이고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장면이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고, 그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이 공존하는 지점이 오히려 더 웃음을 유발했습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실리콘 프로스테틱 소재가 표정 근육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따라간다는 점이었습니다. 프로스테틱이란 인체 조직을 대체하거나 모방하기 위해 제작된 인공 보조물을 뜻하는데, 영화 분장에서는 얼굴이나 신체 일부를 덧씌워 외형을 바꾸는 용도로 활용됩니다. 지금은 기술이 훨씬 더 발전했으니, 골격 차이까지 커버하는 분장도 가능한 수준이 됐을 것 같습니다. 특수분장으로 어디까지 인간의 외형을 바꿀 수 있는지, 화이트 칙스를 볼 때마다 그 궁금증이 새롭게 피어오릅니다.
영화 분장 기술의 발전에 대해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특수분장 부문을 독립 시상 카테고리로 운영하며 그 예술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블랙코미디가 건드리는 불편한 진실
변장을 마친 케빈과 마커스는 파티장에서 아무에게도 정체를 들키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블랙코미디(Black Comedy)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블랙코미디란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나 금기, 편견 등을 과장되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웃음의 소재로 삼는 장르를 말합니다.
화이트 칙스에서 그 소재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 속 고정관념입니다. 금발의 부유한 백인 여성을 향한 시기와 질투, 손님이 어떤 옷을 입어도 무조건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옷가게 직원의 태도, 여성이 지나가면 반사적으로 캣콜링(Catcalling)을 쏟아내는 남성들까지, 영화는 이 모든 장면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몇 배 크게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캣콜링이란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낯선 이성에게 원치 않는 구애 발언이나 휘파람 등을 던지는 성희롱적 행동을 뜻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냥 가볍게 웃고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가 직접 겪어보니 몇 번을 반복해서 봐도 새롭게 불편해지는 장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웃긴 상황으로 지나쳤던 장면이, 두 번째 볼 때는 '이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웃기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숀 웨이언스와 말론 웨이언스 형제가 연출하고 직접 출연한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비판 자체가 이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날카롭게 긁어냈는지를 반증하는 것 같습니다.
화이트 칙스가 다루는 풍자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금발 백인 여성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과 그것을 향한 질투
- 소비자에게 무조건 동조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의 행태
- 여성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남성 중심적 시선
-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편견
아직도 킬링타임 영화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파티가 진행될수록 케빈과 마커스의 위기는 점점 쌓입니다. 농구선수 라테일이 마커스에게 끊임없이 구애하고, 마커스의 부인이 수상함을 느끼고 직접 찾아오는가 하면, 진짜 윌슨 자매까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기 시작합니다. 정체 발각의 위기가 겹겹이 쌓이면서도 두 요원은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는데, 이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코미디의 밀도를 극도로 끌어올립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가 다른 코미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개그의 밀도입니다. 코미디 영화들은 대부분 몇 개의 하이라이트 장면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완급 조절을 합니다. 그런데 화이트 칙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사 하나, 표정 하나, 배경의 지나가는 엑스트라 한 명까지도 개그의 일부가 됩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가 분류하는 코미디 장르 특성 중 하나인 상황 코미디(Situational Comedy)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면서도, 그 안에 사회 풍자를 촘촘하게 심어놓은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출처: 미국영화연구소). 상황 코미디란 인물의 성격보다 인물이 처한 황당한 상황 자체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오늘 기분이 조금 처지고 피곤하다 싶을 때, 저는 고민 없이 화이트 칙스를 켭니다. 무거운 주제나 감동 없이도 한 편의 영화가 사람을 얼마나 웃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 영화만큼 정직하게 그 역할을 해내는 작품을 저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