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우아한 향수 공방에서 천재 조향사가 작품을 완성해가는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막상 재생 버튼을 눌렀더니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천재 조향사 이야기는 맞는데, 그게 배드 엔딩 버전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후각으로 세계를 지배한 남자, 그르누이
18세기 파리의 생선 시장에서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채 발견된 아이, 그르누이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로 버려진 아이라는 설정부터가 이미 이 인물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르누이가 가진 능력은 일반적인 후각 수준을 훨씬 넘어섭니다. 이것은 향수 업계에서 말하는 노즈(Nose)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노즈란 향수 산업에서 조향사 중에서도 극히 뛰어난 후각 능력을 가진 전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수천 가지 향을 구별하고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르누이는 그 노즈의 개념조차 초월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파리에 처음 도착한 그르누이가 도시의 냄새에 압도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어떤 냄새가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경험은 누구나 있기 마련인데, 그 감각을 시각적으로 이렇게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썩은 내와 가죽 냄새 사이에서 귀족의 향을 포착해내는 그의 감각은, 마치 수천 개의 사운드트랙 속에서 악기 하나의 음정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것과 비슷한 차원의 능력처럼 느껴졌습니다.
향수 가게 발디니와의 만남에서 그르누이가 보여주는 능력은 조향(調香), 즉 여러 향료를 배합하여 향수를 만드는 기술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당시 인기 향수의 성분을 단 한 번 맡고 완벽히 재현해냈을 뿐 아니라, 발디니가 수십 년간 배운 향수 제조법을 순식간에 습득해버립니다. 발디니는 그르누이 덕분에 전성기를 되찾지만, 영화는 그 관계가 얼마나 불균형한 것인지를 차갑게 보여줍니다.
체취를 향수로 만든다는 발상, 끔찍하지만 천재적이다
제가 보면서 가장 크리피하게 느꼈던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사람의 체취를 향수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요. 요즘은 향수도, 섬유탈취제도, 샴푸도, 바디 클렌저도 모두 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우리가 실제로 사람의 체취 자체를 인식하는 일이 거의 없잖습니까. 그런데 18세기 파리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향을 낼 수 있는 물품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을 테니, 사람의 체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환경이었을 겁니다.
그르누이가 추구한 것은 냉침법(Enfleurage)을 통한 체취 추출이었습니다. 냉침법이란 꽃이나 향료 원료에서 휘발성이 강한 향기 성분을 동물성 유지에 흡착시켜 추출하는 전통적인 향수 제조 방식입니다. 그라스 지방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 기법을 그르누이는 인간에게 적용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진짜 소름이 돋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체취를 그대로 병에 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체에서 나오는 페로몬(Pheromone)이나 피부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향기 화합물은 살아있는 신체와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의미 있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페로몬이란 동물이나 인간이 분비하는 화학 신호 물질로, 상대의 행동이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성분을 말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페로몬 효과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그 영향력의 정도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출처: 국제향수조향사협회 Perfumers' World).
차라리 그르누이가 체취와 비슷한 향을 조향 기술로 재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충분히 천재성을 보여주면서도 살인이 아닌 창작으로 욕망을 풀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랬다면 결말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르누이가 자신에게 아무런 체취가 없다는 사실을 동굴에서 깨닫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묵직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수백 가지 냄새를 분류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존재를 향기로 확인할 수 없다는 설정. 그 장면에서 그르누이가 느끼는 공허함은 단순한 콤플렉스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위기처럼 읽혔습니다.
그르누이의 범행과 향수 제작 과정을 영화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파리에서 자두 장수 여인의 체취를 맡고 최초의 충동 살인을 저지름
- 발디니에게서 향수 제조법과 조향 기술을 습득
- 그라스에서 냉침법을 배우며 향기 추출 실험을 본격화
- 12명의 여인을 살해하여 향기를 수집, 전설의 향수를 완성
- 사형장에서 완성된 향수를 사용해 군중을 장악
시각으로 향을 구현한 영화, 그리고 원작 소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사실 살인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파리의 거리를 묘사한 장면들이었습니다. 쓰레기가 쌓인 골목, 썩어가는 생선, 짐승의 가죽 더미. 화면만 봐도 냄새가 실제로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 불쾌함이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혁신적인 시도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향기라는 무형의 감각을 시각적 연출만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려 한 것인데, 그 방식이 아름다운 장면과 끔찍한 장면을 극단적으로 병치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영화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기법을 감각의 공감각적 표현(Synesthetic Representation)이라고 부릅니다. 공감각적 표현이란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치환하여 표현하는 방식으로, 영화에서는 향기처럼 카메라에 담기 어려운 감각을 시각화할 때 활용됩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 BFI).
벤 위쇼의 연기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핵심 요소였습니다. 대사 없이 눈빛과 몸짓만으로 그르누이의 내면을 전달하는 장면이 많은데,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배우가 얼마나 치밀하게 캐릭터를 해석했는지였습니다. 집단 난교 장면 이후 눈물을 흘리는 그르누이의 표정은, 수십 년간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 처음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의 무게를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Das Parfum)는 1985년 출간 이후 45개국 언어로 번역되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화가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려 했다고는 하나, 어떤 각색이든 작가의 원래 의도를 100% 담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글로 쓰인 냄새의 묘사를 직접 읽어보면, 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의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원작 소설도 찾아볼 계획입니다.
영화 향수는 불편한 만큼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그르누이가 끝내 원했던 것이 향수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보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불쾌한 연출이 거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 불쾌함이 바로 이 영화의 의도임을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원작 소설과 함께 경험해보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