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때 친구들이 봤다는 말에 별생각 없이 따라 봤던 영화가 있습니다. 팀 버튼 감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코퍼스 브라이드입니다. 그땐 그냥 어둡고 독특한 그림체의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다시 보고 나서는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계산된 결혼 앞에 선 두 사람의 첫 만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어렸을 땐 그냥 '귀신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만 봤는데,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층과 이해관계로 얽힌 어른들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빅터와 빅토리아의 만남은 정략결혼, 즉 사랑이 아닌 계산에 의해 설계된 결합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정략결혼이란 당사자의 감정보다 가문의 이익이나 재정적 필요를 우선시해 성사되는 혼인 형태를 말합니다. 영화 속에서 빅터의 부모는 귀족 가문과 사돈을 맺어 명예를 얻으려 하고, 빅토리아의 부모는 텅 빈 잔고를 채우기 위해 딸을 내어줍니다. 두 가문이 자식의 마음보다 각자의 셈법에 바쁜 모습이 씁쓸하게 교차됩니다.
제가 가장 안타까웠던 인물은 빅토리아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인 결혼에 자신의 의사가 단 한 조각도 반영되지 않는 그 모습이요. 더 많은 돈을 가져올 수 있는 남자에게 보내지는 빅토리아는, 실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됐던 여성의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 선택권이 법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가능해진 일이었습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런 상황 속에서 결혼 리허설 날, 긴장한 빅터는 서약을 계속 틀리고 반지를 떨어뜨립니다. 자책감에 눌린 그는 숲속으로 향하고, 거기서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유령 신부 에밀리와 사랑이라는 감정의 혼란
숲에서 서약을 혼자 연습하던 빅터가 무심코 반지를 끼운 나뭇가지가 해골 손으로 변하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도, 다시 봤을 때도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렇게 나타난 유령 신부 에밀리는 빅터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빅터는 아래 세계로 끌려갑니다.
에밀리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Stop-Motion Animation) 특유의 질감으로 표현된 캐릭터입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란 실제 인형이나 오브젝트를 조금씩 움직이며 한 프레임씩 촬영해 만드는 기법으로, 디지털 애니메이션과 달리 손으로 빚은 질감과 불규칙한 움직임이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냅니다. 팀 버튼은 이 기법을 통해 에밀리의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에밀리의 사연을 듣고 나서 제가 느낀 감정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당해 살해된 뒤, 진심 어린 사랑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빅터가 숲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자, 에밀리는 또 그 말을 믿고 기다립니다. 한 번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다시 믿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솔직히 이해보다 의아함이 먼저였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기에 쏟아붓는 건지, 자신의 모든 걸 누군가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를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봤습니다.
에밀리가 보여주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서사 구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섬세하게 그려진 부분입니다. 기쁨과 배신과 상처와 희생이 한 인물 안에 겹겹이 쌓여 있어서, 단순한 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아까운 캐릭터입니다.
에밀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부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을 배신한 남자의 기억이 있음에도 빅터를 반복적으로 신뢰하는 모습
- 빅터를 완전히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
-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선택
희생이 완성하는 이야기의 무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신선하다고 느꼈던 해석은 바로 빅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빅터가 현실에 크게 미련이 없는 인물이라는 시각입니다. 아래 세계가 실제로 더 화려하게 묘사되고, 에밀리와의 결혼을 위해 독약을 마시려는 결단이 망설임 없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면, 단순히 빅토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산 자의 세계에 남으려 했다고만 보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빅토리아를 사랑하는 빅터가 에밀리와 함께 사후세계에 남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이 영화는 고딕 판타지(Gothic Fantasy)라는 장르 문법 안에 인물들의 감정을 녹여냈습니다. 고딕 판타지란 어둡고 퇴폐적인 분위기, 죽음과 초자연적 존재를 미학적으로 다루는 장르로, 공포보다는 비극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춥니다. 팀 버튼은 이 장르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살아있는 세계보다 죽은 자들의 세계가 더 따뜻하고 생기 있게 보이는 역설적인 연출을 완성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에밀리는 빅터를 대신해 독약을 막고, 빅토리아에게 신부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악인 바키스가 독약을 와인으로 착각해 마시는 장면에서, 복수와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다시 봤을 때, 에밀리의 표정에서 슬픔과 안도와 자유가 한꺼번에 읽혔습니다.
팀 버튼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해 미국 영화 연구 기관은 그의 고딕 미학이 소외된 존재에 대한 공감을 시각언어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작가성을 가진다고 평가합니다(출처: AFI, American Film Institute).
현실적인 감정 구조에 비현실적인 설정을 얹어서, 그 조합으로만 만들 수 있는 슬픔의 질감이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실감했습니다.
코퍼스 브라이드는 귀신이 나오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두 번 보고 나서야 느꼈는데, 이 영화는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안에서 가장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적게 가져가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이 영화를 한번밖에 안 보셨다면, 다음엔 에밀리의 표정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처음과는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