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장 차림의 아기가 서류 가방을 들고 걸어 나오는 예고편 한 장면만으로 영화관을 찾게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드림웍스의 보스 베이비입니다. 저도 개봉 당시 그 예고편에 완전히 낚여서 극장까지 갔는데, 막상 보고 나서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감정이 올라와서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줄거리로 보는 보스 베이비의 세계관
혹시 이런 상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기가 어디선가 '만들어져서' 가정으로 배달된다면 어떨까, 하고요. 보스 베이비는 바로 그 발상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펼쳐놓습니다. 아기들이 공장에서 생산되어 각 가정으로 배송된다는 설정 자체가 다소 파격적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발상이 위험하다기보다 오히려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아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이렇게 유쾌하게 처리된 경우는 드물거든요.
주인공 팀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외동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장을 빼입고 선글라스에 고급 시계까지 착용한 아기 동생이 등장하면서 팀의 일상이 흔들립니다. 이 아기의 정체는 바로 베이비 나라에서 파견된 관리자, 보스 베이비입니다. 보스 베이비의 임무는 애완동물 업계의 팽창,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교배종 강아지의 출시가 아기들에게 돌아갈 사랑의 점유율을 빼앗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점유율이란, 영화 속 설정으로는 사람들이 아기와 애완동물에게 쏟는 애정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강아지가 더 귀여워질수록 아기에게 가는 사랑이 줄어든다는 제로섬 논리인데, 이걸 기업 경영 언어로 포장해서 아기들이 회의실에 앉아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웃음이 나옵니다.
영화 속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보면, 서로 경쟁하던 두 캐릭터가 공동의 목표 앞에서 동맹을 맺고, 갈등을 거쳐 진짜 유대를 형성하는 전형적인 버디 무비(buddy movie) 공식을 따릅니다. 버디 무비란 서로 다른 두 캐릭터가 한 팀을 이루어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보스 베이비는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형제라는 관계성을 중심에 놓아 감정선을 단단하게 유지합니다.
보스 베이비를 볼 때 찾아보는 재미가 하나 더 있는데, 영화 곳곳에 다른 드림웍스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이스터에그(Easter egg)처럼 배치되어 있어서, 이스터에그란 콘텐츠 제작자가 작품 속에 몰래 심어두는 숨겨진 요소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보스 베이비가 담고 있는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기가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파격적인 세계관 설정
- 베이비 나라와 멍멍 나라의 사랑 점유율 경쟁이라는 독창적인 갈등 구조
- 팀과 보스 베이비의 버디 무비 공식을 활용한 형제 서사
- 드림웍스 이스터에그를 찾아보는 숨겨진 재미
첫째로 태어난 사람만 느끼는 공감 포인트
혹시 첫째로 자라셨나요? 아니면 동생이 생겼을 때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으신가요? 저는 첫째라서 그런지 팀의 감정선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습니다. 보스 베이비가 나타난 이후 부모님의 시선이 온통 아기 동생에게 쏠리고, 자신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장면들이 제게는 단순한 픽션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귀여운 아기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다가 어린 시절 제 감정이 소환될 줄은 몰랐거든요. 부모님이 바쁘셨던 탓에 미처 챙기지 못하신 부분들이 있었고, 어렸던 저에게는 과도한 책임감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서럽고 밉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부모님도 아기였던 동생을 누군가가 돌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을 거라는 걸요.
그런데 이해한다는 것과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다른 문제더라고요. 보스 베이비를 종종 다시 찾아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팀이 "나는 가족이 되는 게 뭔지 전혀 몰라. 근데 신경은 쓰여. 네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제가 오히려 위안을 얻는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나도 저랬지 하면서 어린 시절의 저를 다독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동 발달 심리학에서는 첫째 아이가 동생의 탄생 이후 겪는 감정적 혼란을 데스로닝(dethronement)이라고 부릅니다. 데스로닝이란 기존에 독점하던 부모의 애정과 관심을 갑작스럽게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심리적 박탈감을 뜻합니다. 실제로 첫째 아이는 동생 출생 이후 행동 변화나 퇴행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아동학회).
영화가 이 데스로닝의 감정을 꽤 정확하게 짚어낸다고 느꼈습니다. 팀이 부모님에게 아기의 정체를 폭로하려 해도 번번이 묵살당하는 장면, 보스 베이비가 연기를 해가며 어른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장면 모두, 아이의 시선에서 부모의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잘 담아냅니다.
제가 직접 여러 번 다시 봤는데, 볼 때마다 새로 건드리는 감정의 층이 다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웃겼고, 두 번째부터는 팀이 보였고, 지금은 부모님도 보입니다. 이렇게 다층적인 감상이 가능한 애니메이션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이 성인 관객에게도 유효한 감정적 공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정서적 효과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 시청자가 아동 대상 콘텐츠를 통해 과거의 감정적 경험을 재처리하는 현상이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보스 베이비는 겉으로는 귀엽고 유쾌한 가족 애니메이션이지만, 첫째로 자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 감정이 반드시 유쾌하지만은 않아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보스 베이비가 아직 낯선 분이라면 예고편부터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정장 입은 아기 한 컷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끌리실 거고, 막상 보고 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이 마음에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형제자매가 있는 분이라면 더욱이요. 저처럼 첫째이신 분들은 각오하고 보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