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메이즈 러너 1편을 보고도 꽤 오랫동안 2편을 안 봤습니다. 딱히 이유가 있던 건 아닌데, 그냥 미루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유독 지치고 더웠던 오늘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그러고 보니 2편을 못 봤지' 싶었습니다.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은 1편의 미로 탈출 이후를 다루는 영화인데, 좀비와 면역이라는 설정이 생각보다 머릿속을 많이 헤집어 놓았습니다.
미로 탈출 이후 펼쳐지는 세계관
2편이 시작되자마자 저는 1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1편이 '미로를 어떻게 탈출하느냐'에 집중했다면, 스코치 트라이얼은 탈출 이후의 황폐한 세상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토마스 일행이 안전한 곳이라 여겼던 시설이 사실은 WCKD(세계 재난 대응 연합)의 또 다른 통제 구역이었다는 반전이 영화 초반부터 터지거든요.
WCKD는 World Catastrophe Killzone Department의 약자로, 쉽게 말해 좀비 바이러스 확산 이후 세상을 통제하는 조직입니다. 이 조직이 아이들을 구했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설정이 꽤 찝찝하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데, 이 배신 구도가 단순히 '나쁜 놈이 있었네'로 끝나지 않고 이후 장면들과 촘촘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플레어(Flare)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들, 즉 크랭크가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플레어 바이러스란 이 영화 세계관에서 인류를 좀비와 유사한 상태로 만드는 병원체를 말합니다. 크랭크는 기존 좀비 장르의 언데드와는 다르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살아있는 인간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2편에서 주목해야 할 세계관의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WCKD의 이중성: 구원자를 자처하며 실제로는 아이들을 실험 대상으로 착취
- 스코치 지역: 태양 폭발 이후 황폐화된 사막 지대로, 문명이 붕괴된 공간
- 크랭크의 등장: 단순한 언데드가 아닌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인간의 변이체
- 오른팔 조직: WCKD에 맞서는 저항 세력으로, 이후 스토리의 핵심 축
좀비 바이러스 설정,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걸까
저는 좀비가 나오는 세계관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을 반복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랬습니다. 심장이 멈추면 혈액 순환이 끊기고, 뇌에 산소와 포도당이 공급되지 않으면 뉴런, 즉 신경세포가 수분 내에 기능을 잃습니다. 그런데 좀비는 심장도 안 뛰고, 먹지도 않고, 팔이 잘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돌아다닙니다. 어떻게 근육에 명령을 보내 움직이는 건지 사실 납득이 잘 안 됩니다.
더 궁금한 건 감염 경로입니다. 좀비 바이러스 감염이라고 하면 대부분 물림을 통한 체액 전파, 즉 타액(침) 속 병원체가 상처를 통해 혈류로 침투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광견병 바이러스(Rabies Virus)가 이와 유사하게 동물의 타액을 통해 신경계를 침범하는 방식으로 전파됩니다(출처: 질병관리청). 광견병 바이러스란 감염된 동물의 침을 통해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키는 병원체로, 치료하지 않으면 치명률이 거의 100%에 달합니다. 좀비 바이러스 설정이 여기서 모티프를 많이 가져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죽은 지 오래된 좀비가 물어뜯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신입 좀비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변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아와 턱 근육이 아직 어느 정도 기능을 유지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오래된 좀비가 어떻게 치아를 유지하는지는 스코치 트라이얼을 보면서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입니다.
면역자 설정, 과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
이번 영화에서 제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토마스의 면역자(Immune) 설정입니다. 면역이라고 하면 보통 항체(Antibody)를 떠올립니다. 항체란 특정 병원체에 노출된 뒤 면역계가 생성하는 단백질로, 같은 병원체가 다시 침입했을 때 빠르게 무력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방접종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플레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 없이 처음부터 면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선천성 면역(Innate Immunity)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특정 병원체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저항성을 보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실제 의학에서도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에 자연적으로 저항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소수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CCR5-Δ32라는 유전자 변이를 가진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출처: 미국 국립보건원(NIH)). CCR5-Δ32란 HIV가 세포 안으로 침투할 때 이용하는 수용체를 변형시켜 바이러스가 결합하지 못하게 막는 유전자 변이입니다. 그러니 토마스의 선천성 면역 설정이 완전히 허황된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느낀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면역자인 토마스의 피를 브렌다에게 직접 투여해서 감염 속도를 늦춘다는 장면입니다. 혈액형 적합성 검사도 없이 이종 혈액을 수혈하면 용혈 반응(Hemolytic Reaction), 즉 수혈받은 혈액이 수혜자의 면역계에 의해 파괴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료 지식이 없는 일반인 입장에서도 '이게 과연 되나?' 싶은 장면이었는데, 역시 영화적 허용이라고 넘겨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은 1편에 이어 세계관을 넓히면서, 동시에 좀비와 면역이라는 설정으로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구멍이 있지만, 그 구멍을 메워가며 상상하는 재미가 이 시리즈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3편인 데스 큐어로 이어지는 복선도 곳곳에 깔려 있으니, 1편과 2편을 보셨다면 완결 편까지 이어서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3편은 또 지치는 날로 아껴두겠습니다.